연구실에서 오래 공부한 엔지니어에게는 '쉽다'의 기준이 있습니다. 원리를 알면 쉽고, 식이 짧으면 쉽고, 손댈 숫자가 적으면 쉽습니다.
현장에 와서 그 기준이 몇 번이나 깨졌습니다. 오늘은 그중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설정값 세 개면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현장에 들어갈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꽤 신경을 썼습니다. 복잡한 계산은 전부 안으로 숨기고, 현장에서는 설정값 세 개만 넣으면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연구실 기준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돌아온 말은 이랬습니다.
"이것도 어려워요. 그냥 버튼 하나 누르면 되게 해 주세요."
선 하나 바꾸러 출장을 갔습니다
또 한 번은 통신 연결이었습니다. 장비를 시리얼 통신으로 연결하는 일이었고, "RX, TX만 잘 보고 연결하시면 됩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게는 그 한 줄이 설명의 전부였습니다.
현장에서는 원래 쓰던 케이블을 그대로 꽂으셨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왔습니다.
"원래 잘 되던 케이블인데 왜 안 돼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통신선은 전화기와 비슷합니다. TX는 말하는 입, RX는 듣는 귀입니다. 내 입은 상대의 귀에, 상대의 입은 내 귀에 이어져야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그 케이블은 안에서 선이 일자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입은 입끼리, 귀는 귀끼리 붙어 있으니 둘 다 말만 하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선을 한 번 엇갈려 주는 케이블이 필요했던 겁니다. 문제는 두 케이블의 겉모양이 똑같다는 점입니다.

결국 출장을 가서 선을 엇갈려 다시 연결해 드리고 왔습니다. 작업은 금방 끝났습니다.
왜 이게 어려울까
솔직히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숫자 세 개, 선 두 가닥입니다. AI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시대에 이 정도가 왜 어려울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니 답이 보였습니다. AI까지 나온 시대라서 오히려 더 그런 겁니다. 요즘 우리는 스마트폰을 설명서 없이 씁니다. 충전기는 꽂으면 되고, 앱은 누르면 됩니다. 기술이 좋아질수록 사람들이 기대하는 '쉬움'의 기준도 같이 올라갑니다.
현장 입장에서 다시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현장의 하루는 바쁘고, 설정값의 뜻을 공부할 시간은 없습니다. 숫자 세 개는 잘못 넣을 수 있는 곳이 세 군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양이 맞고 예전에 잘 되던 케이블을 꽂는 건 현장의 상식입니다. 케이블 안에서 선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는 겉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쉽다'고 했던 건, 원리를 아는 사람 기준의 쉬움이었습니다.
연구실의 정답, 현장의 정답
연구실에서는 설정값을 세 개로 줄이면 성과입니다. 논문 한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세 개도 '세 개나'입니다.
연구실에서는 원리를 알면 해결입니다. 현장에서는 원리를 몰라도 돌아가야 해결입니다.
어느 쪽이 틀린 게 아닙니다. 정답의 기준이 다를 뿐입니다. 그 사이를 메우는 게 엔지니어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버튼 하나 뒤에는 이론이 더 들어갑니다
복잡한 건 만드는 사람이 안고 가야 합니다. 이론은 버튼 뒤에 숨어 있고, 현장에는 버튼만 보이면 됩니다.
재미있는 건, 버튼 하나로 되게 만드는 데는 설정값 세 개짜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이론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넣던 숫자 세 개를 이제 기계가 스스로 찾아야 하니까요.
케이블도 마찬가지입니다. "RX, TX 맞춰 주세요"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맞는 케이블을 함께 챙겨 드리거나 잘못 꽂을 수 없게 만드는 것까지가 제 일이었습니다.
이제 "버튼 하나로 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렵다는 불평이 아니라 아직 덜 만들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입니다.